예레미야 말씀묵상_2026년 2월 10일(화)_예레미야 31장 1-14절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Автор: 박주용
Загружено: 2026-02-09
Просмотров: 67
Описание:
예레미야 31:1-14절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시는 내용입니다. 남유다의 회복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어서 북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오면,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남유다 백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남유다 백성에게 북이스라엘, 그중에서도 사마리아 백성은 앗수르, 이방민족과 섞여버린 혼합 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사미라아 지역에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미 이방민족의 문화에 익숙한 북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 사람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들과 섞여서 살았습니다. 같이 산 것 뿐 아니라 그들과 혼인하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혼합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남유다 백성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정통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도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으니, 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너로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원을 만들 수 있게 하겠다.’ 사마리아를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충격적입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북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선포하고 찬양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다시 같은 민족, 하나님의 민족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우리의 마음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은 일이고 선한 일이라는 것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 역시 그러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했습니다. 실제로 여로보암 2세 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북이스라엘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가장 위협이 되는 앗수르가 쇠퇴하면서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등 안정적인 시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나는 믿을 수 있는 예언자, 축복을 예언한 좋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대상이 앗수르입니다. 지금 앗수르는 가만히 두면 자멸할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기 위해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앗수르가 악한 민족이고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원수인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하기에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명령을 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가려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악한 민족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우리의 마음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듣는 남유다 백성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어떤 이는 북이스라엘의 회복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북이스라엘의 회복까지는 괜찮지만, 그 일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어 묵상했습니다. 이 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은 당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저주의 대상입니다. 즉, 그들이 선한 민족이기에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구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원수가 아닌 긍휼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이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없기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민의 순간이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도 선한 것인데, 내 마음에는 들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다면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그 일에 상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첫째는 그들을 구원의 대상이 아닌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을 긍휼의 대상이 아닌 판단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어느 순간에는 심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내력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대상으로 보실 때, 우리도 구원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판단의 대상이 아닌 긍휼의 대상으로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악행을 나열하며 참소하는 자가 될 것인지, 하나님의 불공평한 은혜에 항복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불공평했습니다. 우리도 그 덕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미움과 분노의 걸음을 잠시 멈추어봅니다. 물론 내일이면 또 다시 미움과 분노의 걸음을 걷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천천히 미워해야겠습니다. 조금 약하게 분노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왔을 때, 스스로 돌이킬 수 있을 만큼만 미워하고 분노해야겠습니다. 자칫하면 그 미움과 분노가 우리를 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Повторяем попытку...
Доступные форматы для скачивания:
Скачать видео
-
Информация по загруз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