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를 보고 만난 국가공인친일파 김백일. 진짜 파묘의 주인공.
Автор: 김기자의 독립록
Загружено: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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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를 보면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나오죠. 그러면서 태백산맥 줄기를 관통하는 한반도의 허리에 일본인 장군 오니가 쇠말뚝 정령이 돼 박힌 것으로 묘사됐죠. 그걸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지사의 이름을 가진 최민식이 뽑아내죠. 화림과 영근, 봉길과 함께요. 영화가 여러 의미로 시민들께 통한 이유입니다.
다만 제가 항상 말씀드렸듯 현실은 그러지 못합니다. 여전히 현충원에는 12명의 국가공인 친일파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머리 위에 잠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이 현실은 직접 마주해야 더 크게 느껴지고요. 여럿이 함께 앞으로도 계속 여럿이 함께 현충원을 함께 걸으려는 이유입니다. 바꿔야죠.
그럼에도 느리지만 함께하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실은 계속 증명되고 있어요.
일단 첫 투어에서 5명이 함께했는데 지금은 250명이 함께하는 투어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다보니 현충원 안팎으로 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요.
대표적인 예가 국가공인 친일파 김백일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임장교 시절 후반기 교육을 전남 장성에서 받았습니다. 보병학교로 들어가는 길 이름이 백일로였어요. 장교들의 사격장 이름은 백일사격장이었고요. 문제는 당시에는 몰랐어요. 그냥 국군에서 알려준대로 우리군의 영웅이구나 생각했지요. 뒤늦게 김백일이 국가공인 친일파인 것을 알고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우리가 바꿔야할 지점입니다. 그리고 여러 시민들의 노력으로 변화는 민간에서부터 이뤄지고 있고요. 작년 이맘때 진행한 현충원투어 영상과 제 책 현충원한바퀴에 넣었던 김백일 이야기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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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8월 20일,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치안숙정'이라는 이름으로 공작활동을 펼치던 만주국 간도특설대 중대장 김찬규(해방 후 김백일로 개명)에게 토벌 대상인 항일무장세력이 '비보'를 전한다.
김찬규는 부대원을 이끌고 중국 진저우로 향했다. 진저우에서 김찬규가 마주한 것은 간도특설대 부대해체식 현장. 김찬규는 그제서야 일본이 완전히 패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패망한 일본을 뒤로 하고 조부 김영학의 고향인 북녘으로 갔다.
그해 12월, 북에 머물던 김찬규는 봉천군관학교 후배이자 같은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등이 '미군정이 통치하는 남한으로 가자'고 권유해 함께 월남했다. 남한으로 가면서 김찬규는 김백일로 개명했다. 백일(白日), '온 세상이 붉은색(공산주의)으로 물들어도 나는 홀로 하얗게 버티겠다'라는 뜻이다.
남한에 내려온 김백일은 일본군으로 30년 넘게 복무한 이응준을 찾아가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5년 12월 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돼 1946년 4월까지 운영됐다. 군사영어학교 구성원 대부분은 김백일과 같은 만주군,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일본군 출신 군인 중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응준 등의 추천으로 입학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육군군사연구소가 2018년 발간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효시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보면 "군사영어학교 교육이수자 110명 중 108명이 학병을 포함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라고 나온다. 수료한 이들 중 중국군(광복군 포함)은 두명 뿐이다.
김백일은 군사영어학교 수료 뒤 바로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1951년 한국전쟁 도중 대관령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보병학교 교장, 여순사건 특별부대 사령관, 3사단장과 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김백일이 사망한 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고 무공훈장 중 가장 등급이 높은 태극장을 수여했다.
간도특설대 중대장에서 여순 사건 계엄사령관으로
1946년 육군 중위로 임관한 김백일은 불과 4년 뒤인 1950년에 대한민국 육군 소장에 오른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진압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등을 중심으로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여수와 순천 지역에 거주했던 무수한 민간인들까지 살해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 일대에서 국군 5개 연대와 순천서 경찰관들이 주민들을 불법으로 집단 사살했으며, 희생된 민간인이 439명에 달한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중령으로 제5여단을 이끌었던 이가 김백일이다. 그는 여수 현지에 파견된 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여순 사건 이후 그는 대령, 장군으로 승진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손자는 간도특설대
현충원 김백일의 묘비 하단에는 별 3개가 새겨진 석판이 있다. 그곳에 김백일의 주요행적이 기록돼 있다.
"김백일 장군은 고향인 함북 명천을 떠나 조국광복에 생애를 바친 김영학 옹을 조부로 모시고 만주 간도 연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군사학을 닦아 해방된 조국에 환국하여 곧 군문에 들어가 육사 교장을 거쳐 지리산 및 용천지구 전투사령관을 역임하였고 6.25사변이 돌발하자 제1군단을 지휘하고 북진의 선봉이 되어 그 용맹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
석판 어디에도 김백일의 '간도특설대' 등 친일 행적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독립운동을 했던 조부의 기록을 내세운 점이 눈에 띈다. 김백일의 조부 김영학은 만주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해 간도지역 3·1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그러나 손자 김백일의 길은 달랐다. 김백일은 19살 때인 1936년, 일제가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향후 간도특설대의 핵심이 되는 신현준,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등을 만났다. 봉천군관학교를 나온 김백일은 1938년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설립에서부터 기여했다. 해방 때까지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를 거쳐 1944년 대위에 진급한 뒤 중대장에 임명됐다. 김백일의 간도특설대 활동을 높이 평가한 일본 만주국 정부는 1943년 김백일에게 훈5위에 해당하는 경운장(景雲章)을 수여하기도 했다.
A4 22매에 달하는 친일행적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가 기록한 김백일의 국가공인 친일파 규정 사유를 보자.
"김찬규(본명)는 만주국 초기의 장교 양성기관인 봉천군관학교에서 수학했다. 견습기간을 마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듬해인 1938년 12월 간도성 일대 항일무장세력 탄압을 목적으로 설립된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에 선발되었다. 대위 진급 후 특설대 제1련의 연장(중대장)을 맡아 휘하 조선인 장병들을 거느리고 간도성 일대의 동북항일연군을 포함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했다. 1944년부터는 열하성 및 하북성 일대로 이동해 팔로군 '토벌'과 민간인 탄압에도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위원회는 김백일의 행적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특별법 제2조 19호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 일제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덧붙였다.
위원회가 만든 김백일 보고서에는 그의 친일 행적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A4용지 22페이지에
"특설부대는 일본군관의 지휘 일본침략자의 '삼광정책'을 충실히 집행해 적극 소탕을 조직하고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수단으로 우리 항일연군과 기타 애국무장 세력에 대해 피가 낭자한 진압을 했다."
간도특설대의 삼광정책이란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며, 모두 빼앗는다"는 뜻이다. 위원회는 "특설대 설립부터 해산까지 108차에 달하는 토벌활동을 전개했고 강간, 강탈, 고문, 구타, 방화 등 죄악은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여전히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국가공인 친일파'
2016년 광주시는 김백일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백일초등학교와 백일로, 백일어린이공원을 각각 성진초등학교, 학생독립로, 학생독립어린이공원으로 개명했다. 김백일이 생전에 (호남에 위치한) 5여단과 육군보병학교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따 학교와 거리 등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웠으나 친일행적이 드러난 만큼 이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전남 장성 육군보병학교 내 백일사격장 역시 명칭 변경을 논의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남 장성 육군보병학교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서울 용산전쟁기념관 등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묘역 최상단에 위치한 친일파 김백일의 무덤 역시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 발표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장성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국립묘지법 제5조 1항)이라는 게 그 이유다.
현행 상훈법 제8조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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