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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 일본인? "항왜의 진실"

조선

조선왕조실록

왜

김충선

임진왜란

태종

Автор: 🎙 한뼘역사

Загружено: 2025-07-26

Просмотров: 7963

Описание: 조선에 일본인이 귀화해서 살았다고요…? 그것도 1만 명이나?!

오늘 소개하는 이야기는 📜
👉 조선 초 태종에게 귀화한 대마도 출신 평도전
👉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를 배신하고 귀화한 김충선
👉 전투, 정보, 통역까지 활약한 ‘항왜’의 실체
👉 그리고 지금,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되었을지도?

🔥 몰랐던 조선의 숨은 역사, 항왜 이야기

태종실록13권, 태종 7년 3월 16일 경오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평도전을 보내 울릉도에 옮겨 살기를 청하다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와 토물(土物)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貞茂)가 무릉도(武陵島)091) 를 청(請)하여 여러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叛)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常事)로 여기므로 금(禁)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 경내(境內)에서는 상사(常事)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越境)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태종실록19권, 태종 10년 2월 27일 갑자 2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평도전 등에게 경상도 등지의 왜적을 막도록 하다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어 그 아들 망고(望古)와 그 무리 8인을 거느리고 경상(慶尙)·전라(全羅)·강원도(江原道)에서 왜적을 막게 하였다. 조정(朝廷)의 의논이 이르기를,
"평도전(平道全)은 마음씨가 사나워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 무리들이 한데 모여 서울에 사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여, 흩어져 살게 한 것이었다.

태종실록19권, 태종 10년 5월 22일 무자 4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평도전이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하다
평도전(平道全)이 정부(政府)에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은 아직 싸우지도 않은 때에 먼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으니, 어떻게 적(敵)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 몸을 잊고 나라에 〈몸을〉 바쳤은즉, 적(敵)과 싸우러 나가는 날에 마땅히 먼저 아내를 죽여 회환(回還)하지 않을 생각을 굳혔으니,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나를 보낸다면 반드시 나라에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하니, 정부(政府)에서 그대로 아뢰었다. 평도전이 이때에 작은 병이 있었는데, 지신사(知申事) 안등(安騰)이 묻기를,
"네 병을 어찌할 것인가?"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내가 바다 가운데서 생장(生長)하여, 산(山)에서 다니고 물[水]에서 잠을 잤는데, 지금은 편안히 잠을 자고 마음을 놓아 잠시도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운이 원활하지 못하여 병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만약 명령(命令)을 받아 발행(發行)하면, 병은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전망(戰亡)하여 돌아오지 않거든, 나의 작록(爵祿)은 원컨대 내 자식에게 전해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장(壯)하게 여기어, 그 무리 10여 인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4권, 세종 1년 6월 3일 병자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항왜 평도전이 왜구 토벌에 진력하지 않다
전번에 평도전이 대마도에 암통(暗通)하여 말하기를,
"조선이 근래에 너희들에게 대접하기를 갈수록 박하였는데, 만약에 다시 변군(邊郡)을 침략하여 놀라게 하면, 앞으로는 반드시 대접함이 처음과 같으리라."
하였다. 그 후 윤득홍이 왜인을 백령도에서 쫓아내니, 도전은 자신이 일본인이라 진력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득홍이 먼저 적과 싸워 왜적이 이미 패하게 되자, 도전이 마지못하여 조력하였다. 또 도전이 왜적 중에 자기가 아는 왜승(倭僧)을 보고, 득홍에게 청하여 죽이지 마라고 청하니, 처치사(處置使) 성달생이 도전을 힐책하였다. 도전이 먼저 궐하에 와서 자기 공이라 자칭하였다. 이에 이르러 득홍이 사실을 아뢰니, 선지(宣旨)하기를,
"도전과 그 처자들 14명을 평양에 두고, 따라온 자들은 함길도 각 관가에 나누어 두게 하라."
고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도전의 처자들에게 생업을 갖추어 살게 하고, 간혹 쌀과 소금을 주고 또한 비어 있는 집을 주었다.

선조실록92권, 선조 30년 9월 8일 을미 4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김해 부사 백사림을 구한 항왜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항복한 왜인(倭人)이 지성으로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금년 3월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로서 사백구(沙白𩿨)라고 부르는 왜인 1명이 신의 진중으로 투항하였었는데, 신은 저축한 재물이 없어 접제(接濟)하기가 어렵기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에게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황석 산성(黃石山城)에서 패전할 때에 그는 조총(鳥銃)을 힘껏 쏘아 왜적 4명을 죽였는데, 뒤에 김해 사람들이 왜적과 내응하여 먼저 도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쓸모없이 살만 찐 부사 백사림이 장차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게 될 운명이었는데 사백구가 사림을 인도하여 그를 바위굴에 숨겨놓고 황석(黃石)으로 가리고 초목으로 덮어 왜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였습니다.
날이 새자 성 안으로 들어간 왜적이 사방 성문을 지켜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또 꾀를 내어 사림을 결박하고 자신은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사림을 여러 왜적들 가운데로 끌어내어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을 힐책하기를 ‘너희들은 성문을 어떻게 지켰느냐? 조선 도적이 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면서 칼등으로 그들의 등을 내려치니,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이 반죽음이 되어 애걸하기를 ‘우리들이 멀리서 오느라 노곤하여 깊이 잠든 사이에 조선 도적이 함부로 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죄가 크기는 하다. 그러나 상관(上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용서해 주지 않을 터이니, 상관은 우리들의 실수한 바를 보고하지 말아 목숨을 구제해 달라.’ 하고 성문을 열어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사림을 성 밖으로 인도해 나와 산 속에 숨겨둔 뒤에 까닭없이 나가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사(府使)는 마음 속으로 ‘이 자가 도로 왜적에게 투항하여 사실대로 말하고는 무리들을 이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참살(斬殺)하여 그 공을 취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여 극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손발이 부르터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겨우 20여 걸음 옮기어 수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3경(三更)이 되자 사백구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커다란 바가지에 쌀밥·간장·무우를 담고 냉수가 든 호로병과 쌀 한 말까지 가지고 오더니 부사가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서는 발을 구르며 탄식하면서 가만히 부사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사는 그제서야 그가 딴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아니 사백구인가.’ 하고 응답하니, 그는 바로 달려 들어와 부사의 허리를 껴안고서 말하기를 ‘상관께서 제 자리에 없기에 반드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것으로 여기었는데, 상관께서 무사히 여기에 계시니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 상관께서 너무도 배고프고 목말라 하시기 때문에 내가 도로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왜진(倭陣)으로 들어가 「나는 바로 안음(安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장(倭將)의 부하인데, 양식이 벌써 떨어지고 날씨마저 추워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장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대들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노획한 물건을 내게 조금만 주어 쇠잔한 목숨하나 구제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왜적들이 불쌍하다고들 하면서 쌀 한 말과 밥·간장·유의(襦衣) 두 벌을 내어주기에 가지고 왔다.’ 하고서, 밥을 부사에게 주고 옷을 그 몸에 덮어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사 역시 좋은 말로 위로하고 밥을 덜어 그에게 주니 부사가 다 먹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먹었는데 이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유식한 무리들도 가장(家長)이나 처자식을 구제하지 않고 있는데 무식한 오랑캐의 무리로서 지성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특별히 중상(重賞)을 내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항복한 왜인들이 몸을 보전하는 길을 알아 구원(久遠)한 계책을 위하여 성명(姓名)을 조선 사람과 똑같이 고쳐 부르고 싶다고 하니, 항복한 왜인에게 사성(賜姓)하는 일을 조정에서 속히 정탈(定奪)하여 내려 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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