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로마제국 3대 황제, 신이고 싶었던 로마의 폭군
Автор: 지성의숲 : 성필원 작가
Загружено: 2022-08-22
Просмотров: 647
Описание:
칼리굴라(Gaius Caesar Germanicus)는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아버지 휘하의 군인들에게서 칼리굴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AD 19년 아버지가, 33년에 어머니인 대(大) 아그리피나 마저 죽었으며, 31년과 23년에 형들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티베리우스가 교사한 것이라고 여겼다. 칼리굴라와 나머지 세 여동생은 살아남았으며 그는 아버지의 잘 알려진 이름을 따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만이 있어도 내색할 수 없었고 모두가 조용히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야 했다. 로마제국에서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 신중하지 못한 말 한 마디에 곧바로 체포되기 일쑤였다. “죽음조차도 그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다.
카프리 섬에서 말년을 보내던 천하의 티베리우스도 결국은 세상을 떠났다. 드디어 로마의 숨통이 틔었다. 로마에서는 티베리우스의 장례식을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여론이 커졌다. 시민들은 그가 죽고 나서야 체포, 공개재판, 처형과 같은 끝없는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몸에서 모든 힘과 혼이 빠져나갔는데도 원로원은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두려움이 몸에 밴 것이다. 원로원은 감옥 문을 열지 못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티베리우스가 죽던 날 처형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형집행자들은 자신의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범적인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형수들의 목을 졸랐다. 다음 날 또는 다음 주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티베리우스가 정말로 죽었는지 누가 확인할 수 있었겠는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잔혹함과 힘은 죽음 이후에도 영향을 잃지 않았다.
연락병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200km나 되는 거리를 48시간 안에 내달렸다. 티베리우스가 묻힌 미세눔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새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다. 곧 원로원이 소집되었고 로마의 새 주인을 황제로 추대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4살밖에 안 된 가이우스 카이사르, 흔히 칼리굴라라고 불리는 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추방을 당한 아그리피나와,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게르마니쿠스 사령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지배계층 자녀들은 세이아누스와 티베리우스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칼리굴라는 살해하기에 너무 어리고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자, 칼리굴라는 할머니인 안토니아의 보살핌을 받다가 카프리에 있는 늙은 황제의 궁으로 보내졌다. 그는 당시 19살이었다. 칼리굴라는 싫든 좋든 간에 자신을 감추고 가식적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황제는 칼리굴라와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여 칼리굴라를 법정에 세울 만한 말이나 행동을 찾아 내려 했지만, 칼리굴라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가족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언제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었느냐는 식이었다. 칼리굴라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스럽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었다. 얼마나 순종적이고 충성을 다했던지, 훗날 사람들은 칼리굴라만 한 노예도 없었고 티베리우스만큼 악덕한 주인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젊은이의 내면에는 일찍부터 잔인하고 과격한 것을 좋아하는 사악한 본성이 숨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죄수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되는 장면을 즐겨 보았다. 그는 가발과 긴 옷으로 변장을 하고 술집과 음탕한 장소들을 드나들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도 이 사실을 잘 알고서 “가이우스가 살아 있는 것은 나를 비롯해 온 국민에게 불행이다”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손 중에 얼간이나 악질들만 남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몸 속에는 증조부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뿐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칼리굴라는 승전장군과 악티움 해전의 패자의 모습을 동시에 닮은 사람이었다. 안토니우스에게서 물려받은 이집트에 대한 그리움, 동양적 낭만에 대한 병적인 동경 그리고 남매간 결혼에 대한 욕구가 칼리굴라에게 끼친 영향이 점차 드러났다.
칼리굴라는 늙은 황제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도록 명령하고, 조사를 낭독하면서도 고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기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증조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늘어놓았다. 그 이후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캄파니아의 섬으로 여행을 갔다. 칼리굴라는 가족의 유골을 거두어 로마로 옮기게 한 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묘에 안치했다. 원로원에는 살아 있는 여동생 세 명에게 최상의 대우를 하도록 요구했다. 칼리굴라는 자신과 사촌지간이자 공동 상속자이고, 선왕인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티베리우스에게 역시 ‘각별한 신경’을 썼다. 칼리굴라는 17살이 된 어린 티베리우스를 아들로 입양하고, ‘청년 백작’이라는 작위를 내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령했다.
칼리굴라는 다음 희생양으로 마크로라는 이름의 근위대장과 그 부인을 골랐다. 마크로는 악명 높은 세이아누스의 후임자로 칼리굴라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 도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어느새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마크로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하고는 그와 그의 부인이 배에 오르기 전 자살 명령을 내렸다.
칼리굴라는 로마 귀족의 결혼식 도중에 신부를 납치하여 자기 여자로 삼은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 여자들도 모두 쫓겨났다. 카이소니아라는 여인은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은 데다 사치스럽고 경박한 여자였으나 칼리굴라의 열정적인 사랑을 받았다. 칼리굴라는 그녀에게 군인의 옷을 입히고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게 한 다음 자기 곁에서 함께 말을 타게 했고, 친구들에게는 종종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칼리굴라는 카이소니아가 딸을 낳고 나서야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답게 행동했다. 그 딸아이가 칼리굴라의 혈육이라는 사실은 아이의 버릇없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이후 칼리굴라는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존경받는 원로원 의원들은 토가를 입은 채 칼리굴라가 탄 마차 옆에서 뛰어다녀야 했고, 칼리굴라가 의자에 누워 있을 때에는 노예처럼 그 뒤에 서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의원들은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한 번은 황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재무관에게 매질을 하도록 했는데, 먼저 옷을 모두 벗긴 다음 군인들이 채찍을 휘두르기 좋게 그를 군인들의 발 앞에 엎드리도록 했다. 검투사경기가 있을 때에는 관객이 더위에 땀을 흘리도록 일부러 천막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누구도 경기장을 떠날 수 없게 했다. 그는 종종 굶주린 맹수를 경기장에 풀어놓고 검투사 대신 늙고 병든 사람과 신체적 장애가 있는 한 집안의 가장들을 경기에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황제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곡식창고를 폐쇄하고는 ‘기아 상태’를 선포했다. 또 감옥을 돌아다니며 맹수들에게 먹이로 던져줄 만한 죄수를 직접 고르기도 했는데, 결정을 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감옥에 있는 죄수를 전부 끌어내라고 했다. 황제는 선량하고 존경받는 사람을 직접 잡아다가 네 발로 기어 다녀야만 하는 좁은 우리에 가두는가 하면, 잔혹한 농담으로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손으로 외딴 섬에 투옥시킨 여동생에게 자기 섬뿐 아니라 ‘칼도 갖고 있다’고 전하라는 식이었다. 칼리굴라는 사형선고장에 서명을 할 때 “이제야 네가 죄값을 받는구나”라고 중얼거리면서 사형집행자에게 “사형수가 고통스럽게 죽게 하라”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한 증오하게 내버려두라.” 이것이 칼리굴라의 모토였다.
황제는 결코 만족을 몰랐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다. 칼리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목욕탕을 짓게 했고, 세상에서 가장 희한한 요리와 음료를 만들게 했다. 로마의 네미 호수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최고급 유람선이 떠다녔다. 칼리굴라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제 방을 설치하기도 했다. 인공으로 가파른 절벽을 깎는가 하면, 평지는 산으로 산은 평지로 만들었다. 모든 공사는 순식간에 완성되어야 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칼리굴라는 ‘정치’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티베리우스가 물려준 전 재산 27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탕진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칼리굴라는 자신을 로마 재력가들의 ‘상속자’로 내세운 뒤 그런 내용의 통지를 받고도 계속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독이 든 음식을 보냈다. 국고는 무차별적인 압류 덕에 다시 채워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칼리굴라는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밤마다 3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천둥이 치면 황제는 침대 밑으로 숨었다. 그는 여자 옷을 입고 황금색 수염을 길렀다. 오른손에는 신들의 상징인 번개 모형이나 삼지창 또는 뱀 형상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궁전에서 춤 공연을 열어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거의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황제는 3년 10개월 8일 동안 로마를 지배
#칼리굴라 #로마황제
//////
채널 운영자(성필원)는 무계획적인 사상가를 뜻하는 'kabbu'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스스로를 학문과 성공의 지혜를 결합시킨 최초의 세속 철학자로 칭한다. 기존의 인식과 완전히 다른 의미있는 삶의 철학을 추구하면서 그 결과물을 글과 강연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양처럼 살 것인가 늑대처럼 살 것인가』와『생존』, 『정보브로커』,『인간농장』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으며, 『내 안의 백만장자』와 『행동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를 직접 번역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페이스북의 20만명 ‘힘이되는 좋은글’ 같은 다양한 사이트들도 운영중이다.
#좋은글 #앎 #인문학 #역사 #좋은생각 #자기계발 #오디오북 #힐링 #명언 #아이디어 #처세 #문학 #심리학 #건강 #발차기 #운동 #예술 #철학 #인생수업 #비즈니스 #성공학 #인간경영 #자기개발 #위인전 #인간농장 #짧고좋은글
Повторяем попытку...

Доступные форматы для скачивания:
Скачать видео
-
Информация по загруз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