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Описание: 가을과 기도와 방랑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언제나 죽음과의 대결을 통해서 정신적 발전을 이루었다. 비가의 핵심 역시 죽음이었던 것이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 삶의 핵심이며 진주처럼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 역시 죽음이라는 설명이다. 47세에 릴케는 비가를 완성하고 비로소 죽음을 긍정하게 된다. 어쩌면 그의 시는 죽음을 건너가는 뗏목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항상 죽음을 의식하며 살았다. 한밤중에 걷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어디선가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서조차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까닭도 없이 누군가 이 밤에 걷고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까닭도 없이 누군가 이 밤에 죽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925년 가을, 백혈병 말기 증상으로 고통받기 시작한 릴케는 바드 라자의 요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요양원과 로잔에 있는 사보이 병원, 그리고 시에르의 벨뷔 병원에서 마지막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벨뷔 병원에서 발레(스위스 남부에 있는)에 있는 작은 성으로 갔다가 발몽 요양소에서 숨을 거뒀다. 187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1926년 51세의 나이로 육신의 옷을 벗기까지 그는 집 없이 살다 간 영원한 고독자였다. 그는 이 지상에 손님으로 와서, 뜰에 내린 첫서리처럼 투명한 자취로 반짝이다 그렇게 빨리 다녀갔다.
가을의 고독한 남자, 이 방랑시인이 평생동안 찾아 다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릴케는 죽기 1년 전인 1925년,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구체적인 유언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론 계곡 위로 우뚝 솟아있는 오래 된 성당 라로뉴의 묘지에 묻히고 싶었다. 그리고 묘비에는 오로지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문장만 새겨지기를 바랐다.
그는 지금 'R. M. R'이라고 쓴 나무 십자가 밑의 그 교회 묘지에 누워 있다. 다음 세 줄의 시 구절과 함께!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관능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마음이여!” 릴케의 비문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자는 것은 작가다. 작가는 독자들 눈꺼풀 아래에서 잠을 잔다. 물론 잠을 자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작가가 책을 썼다고 해도 온전히 그만의 것은 아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알게 모르게 독자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릴케 외의 다른 사람이 그의 것과 같은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죽는 일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일은 개인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분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눈꺼풀인가? 1900년 9월27일에 릴케는 스물 다섯살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그는 일기에 장미, 잠, 죽음을 연결시켜 이야기했다. 눈꺼풀은 이 세가지를 부드럽게 연결해준다. 독일어로 눈꺼풀(Lidern)은 노래(Liedern)와 발음이 같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장미는 조금 펼쳐진 책이며, 눈꺼풀은 책을 덮는 행위를 상징한다.
릴케는 왜 자신을 장미로 표현했을까? 1929년 4월, 릴케는 자신의 시를 번역하는 베츠와 그의 친구에게 책 한 권을 보냈는데, 그 중 『묘지』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다. “이 무덤들에는 삶의 뒷맛이 있는가? 꿀벌들은 꽃의 잎 속에서 조용히 있는 미완성의 단어 하나를 발견하는가? 오, 행복해지려는 우리의 욕망에 갇힌 꽃이여, 우리에게 다시 와 핏줄 속에 죽음의 기운을 불어 넣는가? 우리의 영향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꽃들이여? 어떻게 우리의 꽃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모든 이파리를 지닌 장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가? 장미는 오직 장미, 그냥 장미가 되고 싶은가?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마음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