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샘물✍ 2022.06.06.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면서 묻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적은 없었는가? 📖 성경봉독: 신애라 집사, 부제: 응대하지 않는 건 무례한 일
Автор: 열두샘물
Загружено: 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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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43: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오늘은 망종(芒種)이며 현충일(顯忠日)이라 많은 이들이 ‘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헌화하지만, 잠든 순국선열들은 한 마디의 말로도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참배나 헌화를 중단하지 않는데, 명절이나 기일을 전후해서 부모의 묘지를 찾는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돌아가신 부모의 대답을 들을 수 없어도, 살아생전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회상하고 언급하며 고마운 마음을 토로하고 기도한 후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동양제과(현재 오리온)의 시그니처(signature)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초코파이’를 1974년 4월에 처음 출시한 이후 38년간 사용하였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란 광고 카피가 지난 2012년 11월 27일부터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로 바뀌었다.
광고의 구성도 절묘한데, 도입 부분은 여전히 오리온 창립 50주년인 2006년에 담철곤 회장이 직접 취입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초코파이 특유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온 다음에 서로 오해를 빚는 상황이 연출된 후에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라는 대사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초코파이가 ‘말하지 않아도’에서 ‘말하지 않으면’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변심(變心)일까? 변절(變節)일까?
한 마디로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화법(話法)을 바꾼 것이지 소비자를 향한 변심이나 변절이 아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주신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21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운을 떼신 후에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5:2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33,34에서도 마찬가지인데, 33절에서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옛 사람에게 주신 말씀 후에 34절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고 천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시점에서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요즘엔 문을 두드리거나 열어 달라하지 않아도 본인이 직접 열쇠로 열고 들어오거나 또는 비밀번호를 누른 후 현관문에 들어서기 때문에 학교에 다녀 온 자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을 보면 자녀가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희한한 질문을 하는데, ‘왔니?’ 또는 ‘왔어?’이다.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왔어요?’ 아니면 ‘당신이유?’란 희한한 질문인데, 남편은 오지도 않았는데 가상현실 장치를 설치하여 마치 온 것처럼 보여주었을 리는 없고, 아니면 설마 옆집 남자가 남편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들어왔을까 의심하여 남편의 목소리라도 들어보아 확인해보려고 질문한 것은 아닐 텐데... (cf. 요즘엔 ‘말없음표’ 또는 ‘말줄임표’도 6개의 점을 다 찍지 않고, 3개만 찍는데 이것도 이 시대의 추세이다.)
하지만 귀가한 자식이나 남편을 보고 별로 물어볼 만큼 궁금한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 응대를 하지 않으면 결국엔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을 보인 것이기 때문에,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라는 속담을 적용하여 ‘왔니?’ 또는 ‘왔어요?’처럼 ‘하나마나한 질문’ 같아도 응대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즐겨보던 드라마도 보지 않고, 또는 관심 있는 뉴스도 보지 않으며, 여느 때와 달리 일찍 잠자리에 들려는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을 보고, ‘자려고?’라며 외마디의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혹시 몸 어디가 불편하지 않은지, 심신을 피곤하게 만든 일이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리라도 주물러줄까’라는 등 애정(愛情)어린 관심과 배려가 내포된 질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질문이다.
어쨌든 굳이 물어보지 않거나 말하지 않아도, 그래서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가짐만 보아도 상대방의 형편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할지라도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닌 무시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누가복음 9:18에 기록된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이 궁금하고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또한 이사야 6:9에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들려준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오늘 인용한 이사야 43:8에 기록된 말씀처럼 유안불간(有眼不看)하고 유이불청(有耳不聽)한 사람들을 이끌어 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하면서, 서로 간에 화답하며 대화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더 깨달을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면, 보다 더 아름답고 유익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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