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간도지방을 다녀와서(수필:손재숙그라시아)
Автор: 금융구단
Загружено: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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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간도지방을 다녀와서
손 재숙
남편의 열망으로 벼르던 백두산과 간도지방을 다녀왔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에 다 있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파와 서파는 중국에 속하고 동파는 북한에 속한다. 남파는 중국이 개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실 동쪽과 남쪽은 북한 땅이라고 봐도 된다. 백두산의 약 60%는 중국에, 40%는 북한에 속한다. 북한이 백두산을 우리에게 개방하지 않으니 천지를 가려면 중국을 통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북파 코스는 몇 차례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2700여 고지까지 올라가서 위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는 조망이고, 서파 코스는 셔틀버스를 타고 중턱까지 가서 1442계단을 올라서 천지를 바로 앞에서 보는 조망이다.
첫날은 연길공항에 내려서 바로 두만강 변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반 간첩법이 생겨서 예민한 상황이니 두만강 변에서 사진 찍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두만강에서 뗏목을 타거나, 중국과 북한의 경계가 되는 철교를 걷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작고한 송해 선생이 이곳에 왔을 때 서럽게 흐느끼면서 제를 지냈다는 가이드의 얘기를 들으며, 강 너머 북한의 남양시 모습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두만강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사진 찍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시 연길로 돌아와 유명하다는 꼬치 집에서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를 구워 독한 고량주를 곁들이며 여행의 설레임을 나누었다. 다들 취기가 오른 상태로 숙소인 국제호텔에 체크인을 하는데 다른 한국인 일행들이 보였다. 그들은 천지를 못 봤다고 아쉬워했다. 우리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음날은 백두산 북쪽비탈로 가는 날, 날씨는 더없이 화창해서 가이드는 천지를 보겠다고 확신을 했지만 순간에 돌변한다는 백두산의 날씨를 믿지 못해 두꺼운 옷과 비옷을 챙겼다. 셔틀버스를 연이어 갈아타며 그 품속으로 들어가 본 백두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해발 2700 미터 아래로 숲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웅장한 자연이 순수한 모습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천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신성한 자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어찌 카메라의 눈이 담아낼 수 있으리.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보며, 민족의 영산임을 새삼 깨달았다. 백두산은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천지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 연길을 출발할 때부터 계속 눈에 들어오는 문구는 ‘길림성 장백산’이다. 우리에게는 백두산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겨울이 길어 흰 눈을 보는 기간이 길다는 장백산인 것이다.
셋째 날은 서쪽비탈로 백두산을 오르는 일정이다. 이맘때쯤이면 만개하는 야생화 들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날씨가 흐릴 수 있다고 걱정했지만 이날도 무척이나 날씨가 맑았다. 길가의 야생화들판과 유황온천을 지나 1442 계단을 오르니 또 다른 모습의 천지가 공중에 떠 있듯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우리는 또 감동하며 연신 휴대폰을 갖다 댔다. 지구의 경치가 아닌 다른 행성의 모습 같다는 생각은 나만 했을까. 그 모습을 가슴에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래 동안 지켜보았다. 또한 이곳 서파에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석이 세워져 있어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북한 쪽을 건너보니 하얀 바위만 납작 누워있다. 왠지 그쪽 풍광이 더 신비로워 보이는 것은 갈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넷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이날은 숙소가 있던,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는 이도백하에서 연길로 돌아가는 도중에 화룡민속촌과 광동촌의 조선족 마을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독립운동 유적지도 방문할 계획이어서 내심 기대가 컸다. 고등학교 때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무척이나 감동했었다. 용이와 월선의 슬픈 사랑에는 가슴이 시렸고, 나라를 빼앗기고 간도지방으로 피신을 간 부분에서는 조국에서 떠밀려 간 우리 민족의 삶이 슬펐다. 그런데 이곳이 그 간도지방이다.
먼저 화룡민속마을을 들렀다. 잘 정비된 깨끗한 농촌 마을이었다. 감주를 맛보려고 들른 한 식당의 화장실은 바닥이 마루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중국의 부(富)가 느껴졌다. 화장실도 비교적 깨끗했고, 길가의 농가들도 잘 살아 보였다. 가이드가 중국은 14억 인구 중에 갑부가 5%이고 8억이 농민인데 그중 2억이 부자라고 했다. 시진핑이 농민들을 잘살게 해 주었기 때문에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단다. 다음에 들른 마을은 광동촌이라는 조선족 마을인데 시진핑이 왔다 간 뒤에 이 조그마한 마을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가 올 때 다들 그가 어딜 방문할지 궁금해 했다. 백두산에 갈 줄 알았는데 이 조그마한 조선족 농촌 마을을 방문한 것이다. 이전에는 조선족이 운영하던 청산리 전투 전시관이 이 마을에 있었는데 지금은 2시간 반 거리 밖으로 옮겨지고 대신 시진핑의 업적이 기록된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선족의 독립성은 점차 사라지고 중국의 소수민족중 하나로 완전히 동화되는구나 싶었다.
그다음은 일송정엘 갔다. 일행 중 한 분이 선구자 노랫말이 적힌 종이를 여러장 복사해 왔다. 우리는 빗속에서 축축한 종이를 들고 선구자 노래를 4절까지 다 불렀다. 가이드는 연변 여성인데 우리의 모습에 감동한 듯했다. 원래 상해에서 활동했는데 두 딸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려고 연길로 왔다고 한다.
조선족은 머리가 좋고 학구열이 높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소학교만 해서 20개가 넘었고 중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연변대학은 중국에서도 좋은 대학에 속한다. 그런데 이 소학교들이 점차 문을 닫아가고 있다. 유일하게 조선족만이 자기 말, 자기 학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중국인 학교에 보내는 이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조선족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세대는 중국에 완전히 동화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원래는 용정의 윤동주 시인 생가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내부관람이 금지되어 일정을 변경했다. 중국이 김치, 한복 등 우리의 문화를 자신의 문화라고 주장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어처구니없음에 실소를 했는데, 이곳에 와 보니 이해가 된다. 그들은 우리 조선족을 자신의 소수민족으로 흡수했고, 김치 한복 등의 조선족 문화가 원래 자기들의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조하고 광고하는 연변인들도 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도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독립투사들도 중일전쟁에 활약한 중국 조선족 독립투사로 탈바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간도 지방은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조선 땅이라고 주장되던 땅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에 못 이겨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했고, 독립투사들도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은 역사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의미가 깊고 조선족들은 이 유적들을 잘 보존했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은 우리 조선인들이 처음 정착해서 마을을 이룬 곳이고 지금도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용두레우물이 있는데 이를 한자로 풀이하면 용용 자, 우물정 자의 ‘용정’이 된다. 처음 14가구가 모여 이 우물의 물을 끌어들인 것이 용정의 시초였다.
일본이 전쟁에 패배하자 간도지방에 살던 우리 민족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반 정도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 국적을 얻었고 반 정도는 돌아가지 않고, 또는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 소수민족으로 남았다. 지리적, 심리적으로도 북한에 가까워 가이드도 가끔 북한에 놀러갔다고 한다. 6·25전쟁 때에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는 이곳 연변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때에는 이들이 중국 국적을 얻기 전이니, 그야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92년 수교를 한 이후 많은 연변인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어떤 이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 고마워하기도 하나, 어떤 이들은 차별과 멸시에 이를 갈기도 한다고 한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은 많이 발전하고 변화해서 10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연길 사람들은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으로 외화벌이를 많이 떠나 연길은 중국에서 가장 달러가 많이 예치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중국은 점차 연길에서 조선족의 자립심을 앗아가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예전에는 백두산의 관리권이 옌벤 조선족 자치주에 있었는데 2005년 길림성으로 이관되었다. 원래 소수민족의 간판은 한자와 함께 그 민족의 문자를 병기하도록 되어있는데, 관리권이 길림성으로 넘어간 이후 이도백하에서는 조선족의 자취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간판도 한자로만 되어 있다. 연길의 간판은 원래 한글이 위에 한자가 아래에 있었는데, 작년에 반대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져 지금 간판들은 대부분 한자가 위에 한글이 아래에 있다.
광동촌을 지날 때 가이드가 우리에게 물었다. “여러분, 사과배 드셔 보셨어요? 아까 제일 큰 사과배 농장을 지났어요.” 사과배란 사과와 같은 색과 맛을 가진 배로 조선의 배를 가져와서 중국의 돌배에 접붙여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 사과배가 꼭 우리 같다고 해요.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니고. 북한사람도 아니고 남한 사람도 아니고 딱히 중국 사람도 아닌 우리들 말이예요.”
영하 30도에서도 잘 자라서 만주 지방에서 한때 엄청 인기를 누렸던 이 사과배가 남쪽에서 나는 맛있는 과일들에 밀려 지금은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조선족의 사과배에 대한 동질감도 점차 옅어져서 장차 옛이야기가 되리라.
다시 한번 길에서 자주 눈에 띄는 ‘길림성 장백산’의 표어가 눈에 들어오며, 우리의 백두산을 찾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온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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