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사당 논개 의기사 진주 진주성 촉석루 의기사(義妓祠) 몇 만배 기개와 충절 발휘하여 왜구장수를 맞서 싸우다니¡
Автор: chaamII
Загружено: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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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논개 의기사 진주 진주성 촉석루 의기사(義妓祠) 몇 만배 기개와 충절 발휘하여 왜구장수를 맞서 싸우다니¡ 1
Show Loyalty of Several Hundred thousand times¡¡ 몇 만(萬)배의 충절(忠節)로 발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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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진주성(晉州城) 촉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 논개(論介)시여! 몇 만(萬)배의 기개(氣槪)와 충절(忠節)로 힘을 발휘해 왜구(倭寇, 일본日本)오랑캐 장수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의암(義岩)위 로 유혹해 가락지 끼운 손으로 껴안은 채 남강으로 투신하여 순국(殉國)하시고 진주성과 촉석루의 애(몹시 수고로움.옛말창자)를 끊으셨나여!! ^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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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矗石樓)아래 주춧돌(초반礎盤)모습! 매우 단단하고 튼튼한 모습이네여!
마룻바닥도 아주 튼튼히 차곡 차곡 쌓아 배열하였고 주춧돌 끝 부분과 나무기둥이 매우 정교하게 지그재그로 짜맞추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1592년 임진왜란때 김시민 장군과 조선 백성들이 한 몸이 되어 이 진주성을 지켜낸 것과 같이 이것을 계속 잊지말고 제2의 임진왜란을 다시 맞닥뜨려 싸운다 해도 막강히 지켜내겠다는 결의가 똘똘 뭉쳐져있는 것과 같아보이니...
이것을 보니 왠지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나네여¡
의기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지수문(指手門)!
지수문(指手門)현판 및 내부 전경!
의기에 가득찬 검은 대나무(오죽,烏竹/Phyllostachys nigra/꽃말:인내)가 쫙 펼쳐져 문옆에 기개있게 당당하게 보초를 서 있고 의기사 전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의기사(義妓祠) 정문 현판이 나오고 우측에 매천 황현 시판(梅泉 黃玹 詩版_주1 설명참조) 과 좌측에 기생 산홍 시판 (山紅 詩版_주2 설명참조)이...
그리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의기사기 (義妓祠記_주3 설명참조)가 걸려 있어 한층 뜻이 깊어보입니다.
의기사(義妓祠_주4 설명참조)란 무엇일까여?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년)6월 29일, 임진왜란(壬辰倭亂_주5 참조)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_주7 참조)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잠깐 약간의 성금을 하고 [의기에 서릿발처럼 당당히 서 계신 논개시여! 그 눈빛으로 왜구 장수들의 심장을 꿰뚫어 다신 이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하소서!]
~중략! 제목아래 설명참조!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년)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읍니다.
영조 16년(1740년)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년)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 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읍니다.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읍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읍니다.
1962년에 사당 보호를 위해 모의당(募義堂)을 세웠읍니다.
*** 주 해 ***
주1) 매천 황현 시판 [ 梅泉 黃玹 詩版 ]:풍천도구수유향...
이 시를 풀이하면
楓川渡口水猶香(풍천도구수유향) 풍천나루의 강물은 아직도 향기로우니
濯我鬚眉拜義娘(탁아수미배의낭)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씻고 의로운 논개에게 절 하노라.
惠質何由能殺敵(혜질하유능살적) 아름다운 성품으로 어떻게 적장을 죽였던가!
藁砧己自使編行(고침기자사편행) 죽음을 각오한 채 거룩한 뜻을 단행했네.
長溪父老誇鄕産(장계부노과향산) 장계의 연로자들은 고향 사람이라 자랑스러워하고
矗石丹靑祭國殤(촉석단청제국상) 촉석루에서는 단청하고 순국함을 제사지낸다.
追想穆陵人物盛(추상목룽인물성) 화려한 왕조 돌아보면 인물이 많다 하지만
千秋妓籍一輝光(천추기적일휘광) 기생이었어도 오랜 세월 그 이름 한결같이 빛나리.
주2) 기생 산홍 시판 [ 山紅 詩版 ]: "매국노이자 당시 최대 권력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지조를 지킨 산홍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요 순국항일지사"라고 해야함. "을사오적 이지용 첩 될수 없다"자결한 기생.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군부대신 이근택,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 한 편 시를 풀이하면
천추분진의 (千秋汾晋義) 긴 세월 넘쳐 오르는 진주의 의로운 기상
쌍묘우고루 (雙廟又高樓) 두군데 사당 다시 의로운 기상 높이 솟았네
수생무사일 (羞生無事日) 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사는 내자신이 부끄럽구나.
가고한만유 (茄鼓汗漫遊) 북치고 피리불고 하며 세월 보내는 내가 한스럽구려!
주3) 의기사기 [ 義妓祠記 ]: 정약용이 자신의 장인 홍화보가 의기사를 보수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기문.1802년(순조2) 지음.
논개가 왜장을 죽여 국가의 은혜에 보답한 일을 칭찬.
의기사 기문의 원문은...
의기사기 (義妓祠記)
석일(昔日) 추지함진주야(酋之陷晋州也) 유기의낭자(有妓義娘者)
인일추대무어강중지석(引日酋對舞於江中之石) 무방합(舞方合)
포지투연이사(抱之投淵而死) 차기사야(此其祠也) 嗟呼 (차호)
기불열렬현부인재(豈不烈烈賢婦人哉) 금부일추지섬(今夫一酋之殲)
부족설삼사지치(不足雪三士之恥) 수연(雖然) 성지방함야(城之方陷也)
인번옹병이불구(隣藩擁兵而不救) 조정기공이낙패(朝廷忌功而樂敗)
사금탕지고(使金湯之固) 실지궁구지수(失之窮寇之手)
충신지사지분욕에한(忠臣志士之憤欲恚恨)
미유심어형역자의(未有心於形役者矣) 이묘소일여자(而眇少一女子)
능섬적추이보국(能殲敵酋而報國) 군신지의(君臣之義)
교연어천양지간(皦然於天壤之間) 이일성지패(而一城之敗)
부족휼기불쾌재(不足恤豈不快哉)
순조 이년 임술 (純祖 二年 壬戌)
다산 정약용 기 (茶山 丁若鏞 記)
이를 해석하면
‘임진왜란 때 왜적의 우두머리가 진주를 공격하여 무너뜨렸을 때 의로운 낭자가 있어서 그 왜장을 이끌고 강 가운데 돌에 가서 마주 춤을 추다가 바야흐로 춤사위가 합쳐질 때 끌어안고 깊은 곳에 몸을 던져 죽으니 여기서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아, 슬프다! 어찌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 현숙한 부인이 아니더냐, 이제 무릇 한 우두머리를
죽여서 족히 세 분 씩씩한 선비의 치욕을 씻지는 못했으나, 성(城)이 바야흐로 적의 공격에
무너질 적에 이웃의 군사요지에서는 병사들을 갖추고도 웅크린 채 구원하려 하지도 않았고
조정에서도 꺼려서 기꺼이 패하여 쇠붙이를 녹여 굳어진 것만큼이나 단단한 곳을 궁한 도적 떼의 손이 잃으니 충신과 지사(志士)들의 분노와 한스러움이 심히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그마한 한 여자가 능히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서 나라에 보답하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환하게 되어 성 하나쯤 패한 것으로는 족히 근심할 것 없으니 어찌 통쾌하지 아니하랴.’
순조 2년 임술 다산 정약용 씀
이 기문(記文)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문이 실려 있으나 현재 의기사에 걸려 있는 현판은 그 기문의 절반 분량에 해당하는 내용만 각자됨
느낀 감회를 읊은 시 한 수(首) 덧붙임
야만족이 사는 바다 동쪽 해가 저물어 세월 많이 흘렀는데
붉은 다락이 멀어 뵈니 산하도 어둠침침하네.
꽃핀 못에 해 비치니 가인이 춤을 추고
그림 같은 다락에 긴 피리소리 울리니, 씩씩한 선비는 노래 불렀네.
전쟁이 휩쓴 땅에도 봄바람 불어 초목은 다시 살아나고
황폐한 성에 밤비 내려 물결이 불어난다.
지금도 남겨진 사당엔 죽은 분의 영혼들이 계실세라.
촛불 켠 삼경(三更:밤11시~새벽1시 사이 한밤중)에 잘 빚은 술로써 지샌다.
[네이버 지식백과][義妓祠記文]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4) 의기사 (義妓祠):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인조 7년(1629년)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년)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 세움. 영조16년(1740년) 병사 남덕하(南夏1688∼1742년)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됨. 1962년에 사당 보호를 위해 모의당(募義堂) 세움
주5) 임진왜란(壬辰倭亂):조선(朝鮮) 선조 25년(1592년)에 일본이 침입(侵入)한 전쟁(戰爭). 선조 31년(1598년)까지 무려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1597년에 재 침략(侵略, 정당한 이유없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감)한 것을 정유재란(丁酉再亂_주6 참조)으로 달리 부름.
주6) 정유재란(丁酉再亂):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 휴전 교섭이 결렬된 뒤, 선조 30년(1597년)에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등이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 이순신(李舜臣)장군등의 활약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철수함
주7) 논개 (論介):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해 순국한 의기(義妓)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 참석후 계획대로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속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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