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추목 151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by 핍핍 얀시 25년7월31일
Автор: Love&LivetheBible
Загружено: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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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내가 살펴본 모든 구약성경은 이 질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애굽에서 노력을 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는 모세의 확언을 믿을 수 없었다. 욥의 친구들은 미약한 욥의 우주의 여호와께 중요하다는 불합리한 생각을 조롱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이 질문을 보다 냉소적으로 던졌다. 해 아래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라도 있는가? 모든 인생이 헛되지 않은가?
four.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 : 시편
인생처럼 뒤죽박죽인 시편
시는 신비스럽게 그 마술을 펼친다. 적어도 현대인들이 시에서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시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시편을 찾는 것은 시인의 언어나 이미지가 우리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을 얻는다. 바로 변화된 시각이다. 이것이 시편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거는 마술이다. 시편은 나의 영적 시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기본적인 수준에서, 시편은 내가 인생에 대해 믿는 것과 인생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것을 조화시키도록 돕는다. 어릴 때 이런 식사 기도를 배웠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운율에는 일종의 주술(呪術)이 담겨 있으며, 실제로 이 기도는 시편에서 인용한 것처럼 들린다. 어떻게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있겠는가? 신학적 단언의 문장 둘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문장 하나, 모두 편리하게 1음절 단어(great, good)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선하신가? 왜 선교사로서 잠재력이 무한했던 젊은 아버지는 서른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는가? 왜 홀로코스트에서 그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부당하게 죽었는가? 왜 미국에서 가장 종교적인 지역인 도심 흑인 거주지역이 가장 가난하고 희망 없는 지역인가?
이 음식을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나는 자존심 강한 청소년 시절 풍요로운 미국의 강들과 마술사 같은 농부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면서도 이 기도를 계속해서 드렸었다. 수단과 모잠비크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된 건가? 이들은 음식이 없어 죽어가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앞의 세 단락을 읽으면서 조금 언짢게 느꼈다면, 시편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시편에는 세상은 자신들을 버릴지라도 자신들은 사랑이 많고 은혜로우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고뇌에 찬 일기가 담겨 있다.
시편기자들은 내가 언급한 주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할 때가 많다. 앗수르, 바벨론, 바사와 같은 거대 제국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말렉 족속, 헷 족속, 가나안 족속 같은 역겨운 종족들이 차례로 하나님의 선민을 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이 하나님께서 물러나라고 명하신 사울의 창을 피해 10년이나 동굴에 숨어 지내야 하는가? 감사할 만한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시인들이 이러한 문제와 힘겹게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편이 많다. 때때로 시인들은 시편을 쓰는 바로 그 과정에서 믿음의 감정과 믿음의 교리를 조화시키는 법을 찾아낸다. 신명기에서 연설(설교)을 하는 모세처럼, 시편기자들은 좋았던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때를 되돌아본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시 105:4-5)
시편 62편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욥이 결코 조화시킬 수 없었던 두 가지 사실을 대담하게 주장한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시 6:11-12)." 그러나 때때로 시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욥과 똑같은 말로 끝내고 만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이 시점에서, 150편의 시편이 임의대로 순서가 매겨졌다는 사실이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친밀감과 거리감으로 이루어진 시소 주기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된 시편이 나란히 놓인 것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시편 22편과 23편이다. 시편 23편은 포괄적인 약속과 더없는 위로를 주는 목자의 노래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시편 22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으로 시작한다. 두 시편 모두 다윗의 것이지만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다스리시며 가난한 자들이 배불리 먹게 될 미래를 고대하면서 일종의 해답을 찾는다. 그러나 그는 이 시편을 쓸 때의 느낌을 분명하게 밝힌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2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6절)...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3절)...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14절)...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16절). 그러나 23장으로 넘어가면 이런 감정들은 별나라 이야기 같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6절).
비슷한 불일치가 시편 102편과 103편에서도 나타난다. 102편은("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모든 친구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늙고 연약한 사람의 절망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편은 마치 열병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가 갈겨 쓴 고통의 목록 같다. 그러나 103편은 장엄한 찬양 시로서 단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한 쌍의 연속한 시편 가운데 한 쪽만 선택해서 설교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시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법을 배운 것은 시편이 두 시각을 모두 포함하지만 두 시각이 하나의 시편에서 모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두 시편에서 따로 나타나며 두 시편 사이에는 결코 조용하지 않은 분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편 103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노래한다(2절). 바로 이웃한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은택을 회상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지만 뼈가 냉과리같이 타고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눈물 섞인 떡을 먹고 있는 그의 상황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로서는 성경에 두 종류의 시편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기쁘다. 내가 시편 22편이나 102편의 저자처럼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오면 영적 거장들도 - 가장 두드러지게는 예수 자신도 -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리라. 그리고 나를 옭아매는 고난에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저항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편 23편과 103편의 잔잔한 메시지를 떠올리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으리라. 시편 23편은 그 자체만으로는 응답이 쉽게 온다는 믿음을 낳는다. 시편 22편은 그 자체만으로는 영적 절망을 낳는다. 그러나 함께 하면서, 둘은 현실과 소망을 잘 조화시킨다.
150편의 시편은 삶 자체만큼이나 어렵고,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뜻밖의 위로를 줄 수 있다. 캐슬리 노리스는 「수도사의 삶」(The Cloister Walk)에서 "뉴스를 놓고 기도함"으로써 시편을 자신의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는지 들려준다.
성소의 유린에 대한 시편 74편의 탄식은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내게 있어 국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위한 기도가 되었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1992년초 로스엔젤레스 폭동은 그 다음 날 아침 수도사들의 합창으로 들은 시편 55편 말씀에("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대한 새로운 정황(context)을 제시했다. 발칸 반도의 내전 기사를 읽으면서 시편 79편을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들을 때 종교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정당화되는 종족주의와 폭력이 이 땅에 계속 미치는 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시편과 텔레비전이 대량학살, 변호해줄 사람이 없는 자들에게 자행되는 불의, 악의에 찬 말로 공개 재판을 받는 사람들처럼 같은 사건들을 보도하더라도 시편의 냉혹한 현실이 주는 절망은 텔레비전 뉴스가 주는 절망과는 다르다. 불려지기 위한 찬양 집인 시편은 뉴스 방송 끝머리에 붙는 "인간의 관심 어린" 이야기들이 줄 수 없는 희망을 담고 있다. 시편은 거울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춰주지만 우리가 훔쳐보는 자들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시편은 자신들의 폭력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치를 재점검하게 한다.
여기 시편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1977년 냉전이 극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아나톨리 스카란스키(Anatoly Shcharnasky)라는 뛰어난 젊은 수학자이자 체스 플레이어가 이스라엘 이민을 거듭 시도했다는 혐의로 KGB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소련의 굴락(Gulag, 정치, 사상범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13년을 보냈다. 스카란스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50편의 시편 모두를 (히브리어로) 읽고 연구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 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점점 내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밝은 소망으로 바뀌고 있어요."
스카란스키는 시편을 너무나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간수가 시편(책)을 빼앗자 눈 위에 누워 간수가 시편을 돌려줄 때까지 움직이길 거부했다. 13년 동안, 그의 아내는 세계를 돌면서 남편의 석방 운동을 벌였다.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서 명예 학위를 받으면서 대학의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토플 감옥의 외로운 감방에 다윗의 시편과 함께 갇힌 채, 아나톨리는 수천 년 전 이스라엘 왕이 쏟아낸 말에 자신의 가장 깊은 내적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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