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 볼링 앨리 전투, 백선엽 장군, 워커 미 8군사령관, 융단 폭격., 한국 전쟁, 6.25 전쟁, 영천 전투, 낙동강 방어선
Автор: 밀리테크학자형성우
Загружено: 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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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대학교 형성우 교수입니다.
오늘 강의 내용은 다부동 전투입니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선 방어작전의 최대 격전이었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5일부터 8월 30일까지, 국군 1사단이 미 27연대와 23연대의 지원을 받아, 왜관읍 다부동일대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입니다. 전반적인 상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8월 3일에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가 되는데, 국군 1사단은 낙동리로부터 다부동 일대를 점령 방어하고 있었으며, 북한군 2군단 1, 13, 15 사단은 대구 점령를 시도하고 있었으며, 대구의 관문인 다부동 점령은 필수였습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증강으로 전투력이 상승되었고, 반면에 북한군은 보급 제한으로 전투력이 열세했습니다. 당시 불독 워커,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하게 한다. 워코 장군의 경력을 살펴보면, 1912년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시는 보병 대대장으로 2차 세계대전은 미20 군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1950년 7월 13일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워커장군은 애석하게도 1950년 12월 23일, 미 제24사단에 부대 표창을 주기 위해 방문하던 중 의정부 부근 빙판 고갯길에서 마주오던 국군 6사단트럭이 충돌하면서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작전시 “적에게 한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수천명에 달하는 전우의 죽음에 보답하는 길이다.” 라고 예하부대에 결사의 전투 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작전 환경을 살펴 보면, 작전지역은 328고지- 수암산–유학산등의 횡격실능선으로 지형기복이 극심하고, 낙동강은 하폭 500에서 1,000미터, 유수폭은 200에서 500미터였으나, 당시 가뭄때문에 부분적 도섭이 가능하여, 천연 장애물로서의 효과는 감소된 반면에 적의 도하 공격에는 유리하였으며, 왜관에서 대구, 상주~군위~대구로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여 전차와 부대 기동에 유리하였으며, 당시 37도의 혹서는 공격부대에 불리하였습니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 조정상황을 보면, 최초 방어선은 마산~왜관~낙동리~ 영덕에 이르는 약 240km였다. 그러나 낙동강이라는 천연 장애물의 이점, 방어선에 배치할 병력 절약으로 예비대 확보,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한 내선 작전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8월 11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180km로 전선을 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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