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 조선일보를 친일 신문으로, 광산부자 방응모
Автор: 그린비트
Загружено: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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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방응모 #친일청산
조선일보와 방응모, 민족지에서 친일지로의 변절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으면서도 가장 불신받는 신문으로 꼽히는 조선일보.
1920년 창간 이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며 민족주의와 친일 사이를 오가던 이 신문의 궤적은 단순한 언론의 역사라기보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에 가깝다.
조선일보는 1920년 일본이 소위 '문화정치'를 시행하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창간되었다.
창립 모체는 대정친목회로, 송병준, 이완용, 민영휘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초대 사장은 조진태였으나, 왕족 간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정간되고 자금 문제로 사퇴하면서 변호사 유문환이 2대 사장에 올랐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수차례 정간을 당하며 경영난에 시달렸고, 1921년 친일관료 송병준이 판권을 인수했다.
그는 민족운동가 남궁훈을 사장으로 앉혔으나, 뜻대로 조선일보를 통제하지 못하자 자금 지원을 끊었다.
그 후 1924년, 만석꾼의 아들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신문은 반일 민족주의 성향으로 급변했다.
4대 사장에는 월남 이상재가 취임했고, 조선일보는 신간회 결성, 문자보급운동, 한글 교재 무상 배포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홍명희, 박헌영, 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입사하며 사회주의적 경향도 띠었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경영난과 일제의 탄압이 겹치며 조선일보의 민족주의 노선은 후퇴하게 된다.
1932년, 안재홍 사장이 ‘의연금 착복’이라는 일제의 명분으로 구속되며 조선일보는 위기에 처했고,
이후 조만식이 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짧은 임기 끝에 경영권을 넘긴 인물이 바로 방응모다.
방응모는 원래 동아일보 정주지국 경영에 실패한 인물이었으나, 광산업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는 민족지였던 조선일보를 적극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전환시켰고, 이후 17년간 그 기조는 유지되었다.
동아일보 김성수가 초기에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던 것과는 달리, 방응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된다.
그는 신문사업 확장과 함께 1935년에는 "조광(朝光)"을 창간, 친일 논설과 시국 강연을 통해 전쟁을 독려했다.
1942년에는 "징병령 실시에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설까지 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여러 친일단체에 참여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선정되었다.
광복 후에는 안재홍의 권유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고, 김구를 후원하면서 독립촉성회 부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김구가 좌우 합작에 나서자 등을 돌렸고, 직접 "김구 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며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사회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현실 권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적 친일언론인이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방응모는 북한에 납북되었고, 1950년 9월 미군의 폭격으로 개성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1970년대까지 그를 사주로 공식 표기하며 그 ‘유산’을 이어갔다.
방응모가 만든 동방문화학원은 훗날 숭문중·고등학교로 발전했고, 조선일보의 후계자 방우영이 이사장을 맡았다.
결국 조선일보는 단지 언론이 아니라, 한 시대 권력의 도구였으며 방응모를 통해 친일의 뿌리 깊은 실체를 드러낸다.
오늘날까지도 조선일보는 방응모 시절부터 형성된 권언유착의 기틀 위에 놓여 있으며, 그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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